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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소설

K의 믿음 (방구석 소설쓰기 EP.2-1)

by 강태식 2024.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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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도 더 된 이야기다. 30살을 맞이하는 나이였다. 콩나물대가리를 닮아 별명이 '콩나물'이던 녀석이 친구K와 나(태식)를 술자리로 불러냈다. 친구K는 정신과 의사고, 나는 그들과 10년 지기 친구다.
 
이유인 즉슨, 콩나물이 여자친구와 크게 싸웠다고 한다. 여자친구가 싸우고 나서 모든 연락을 씹고 있다고 했다. 콩나물은 "본인이 질린건지, 다른 남자가 생긴건 아닌지, 정말 헤어지게 되는 건 아닌지 너무 불안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출처: Unsplash 의 Ivan Lapyrin

 
잠잠히 듣던 친구K가 말을 꺼냈다.
 
K) 태식아. 너라면 어떻게 할 거 같냐?
 
식) 나는 일단 연락을 피하는 사람 자체를 너무 싫어하는데... 이미 저기서 눈물은 멈췄을거 같아. 그래도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연락이 오길 기다릴 것 같아. 연락오면 바로 답장하지 않을까?
 
K) 그래,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요즘 저런 행동을 가르쳐주는 비즈니스가 있는거 알아?
 
콩) 일부러 연락을 씹으라고 가르쳐 준다고? 저건 쟤가 정말 나를 잊었기 때문에 하는 행동이라고.
 
K) 아니야. 너 여자친구 유튜브 재생목록에서 관련 영상을 본 적 있다며. 내 말이 맞을거야. 우리 업계에서도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비즈니스거든. 이별 후에 사람들이 정신을 못차리잖아. 그런 사람들에게 고액을 받고 재회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면서 상담을 해주는거야. 그 상담사라는 사람들은 라이센스가 있을거 같아? 전혀. 내담자의 흥분한 마음을 들어주고, 본질적으로 상대방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지침을 주는거야. 만일 재회하면 본인들 덕이라고 돈벌고, 단기간에 안되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면서 희망고문해서 돈벌고, 영영 재회가 안되면 그게 오히려 좋은 일이라고 말하면서 돈벌어. 너 의사가 저런 지침을 줄 수 있을 것 같아? 연락을 무시하고 프레임을 높이라고?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마음을 다른 곳으로 돌리라고? 내가 너한테 그런 말 한 적 있어? 내가 이 업계에 있지만 그건 진짜 건강하지 못한 방식이야. 그렇게 재회하면 행복할 것 같아? 신뢰를 무너뜨려가며 만든 재회는 결말이 정해져있어. 상대가 피폐해진 채 떠나거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바람피거나 둘 중 하나야. 그럼 내담자는 어떻게 하겠어. 또 상담 받으러 와. 한 번 상담 받으면 멈추질 못하는 굴레에 빠져 버려. 계속 돈을 쓰게 만드는거야. 비즈니스 관점에서 볼 때는 아주 멋진 구조지.
 
K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K) 사람은 본능적으로 가지기 힘든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지. 그러나 성인이 되어서도 그런 식으로 사고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미숙한거야. 저런 방식에 마음이 흔들린다는건 콩나물 너가 성숙하지 못하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어.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너를 아프게 두지 않아. 만약 원하는 바를 얻어내기 위해서 상대를 아프게 하는 이기적인 사람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헤어지는게 나아. 콩나물대가리, 그 사람은 너를 가지고 싶은거지, 사랑하는게 아니야. 이제 그만 헤어지고 너를 아껴주는 사람 만나도록 해, 자식아.
 
콩나물은 K의 팩폭에도 제 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이미 많이 취해서 내일 이 대화를 기억할 수나 있을까 싶었다. 오히려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내가 생각이 많아졌다. 콩나물은 연신 슬픔을 토로하다가 엎어져 버렸고, 나는 오랜만에 K랑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나갔다.

출처: Unsplash 의 The Creativv

 
식) 진심으로 나를 아껴주는 사람이 존재할까?
 
K) 왜 없어. 예전에 '꽃잎이'가 너를 엄청 아껴줬다며?
 
식) 그건 20대 초반이니까 가능했지. 이제는 30대잖아.
 
K) 분명 그런 사람이 또 있을거야. 너희 사소한 일로 말다툼 하다가 시험공부 한다고 헤어졌었나? 그때는 너가 소중한 줄도 모르고 헤어졌지만, 이제는 그런 사람의 가치를 알게 되었잖아. 나타난다면 분명 알아볼거야.
 
식) 돌이켜보면 '꽃잎이'는 엄청 용기있는 친구였어. 그러니까 본인이 상처받을 두려움을 이겨내면서도 사랑을 줄 수 있었던 것 같아. 용기를 내서 상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게 어려운 일이더라고.
 
K) 몇 번 상처받다 보면 용기내서 사랑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지지. 그래도 상대를 믿고 사랑할 용기가 필요해. 어차피 열정적으로 사랑하든 소극적으로 사랑하든 상대에게  배신을 느낀다면 그걸로 끝나는건 같으니까.
 
식) 상대가 배신한다고 해도 진심이 느껴진다면 한번 쯤은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경우는 너무나도 많잖아.
 
K) 글쎄... 나는 이론적으로 말해줄 수 밖에 없잖아. 신뢰가 깨진 관계는 다시 봉합하기 정말 힘들어. 만일 다시 만난다면 그건 기존의 관계랑은 완전히 다른 관계라고 봐야 돼. 그래야 다시 만날 수 있어. 아예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일거야. 근데 그럴거면 뭐하러 그 사람을 다시 만나겠어.
 
식) 복잡한 문제구나. 그럼 어떤 사람과 평생을 함께해야 할까?
 
K) 너가 늘 말하는거 있잖아. 어떤 상황에서도 이 사람을 믿을 수 있고, 그 믿음을 평생 유지해도 될만한 사람일 것. 그거 이상의 답이 있을까. 우리가 오랫동안 함께했기 때문에, 이젠 내 생각이나 너 생각이나 거기서 거기야. 나와 상담 스타일이 다른 웬만한 의사보다 오히려 너랑 생각이 비슷할 수도 있어.
 
식) 우리 미숙한 시절부터 함께 한지도 참 오래됐지. 저걸 머리로는 아는데 행동하긴 참 어려워
 
K) 항상 자신을 믿어야 해. 
 
식) 그 말이 가장 어렵다. 
 
K) 사람을 하나하나 소중히 여기다 보면 언젠가 인연을 만날거야. 어려운 일이 닥쳐도 서로 먼저 용기를 내서 잘 극복할 수 있을거야. 그리고 혹시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 나랑 이야기 하면 되잖아.
 
식) 맞아. 우리 함께면 고민될 거 없지.
 

출처: Unsplash 의 Lexi Anderson

 
우리의 술자리는 그렇게 마쳤다. K는 콩나물을 데리고 택시를 타고 갔고, 나는 먼 거리를 걸어서 집으로 왔다. 그날따라 생각이 많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씻지 못하고 잠에 들었다.
 
그러고 나서 5년이 흘렀다.
 
콩나물은 결혼을 했다. 아직 아기는 없지만 와이프와 알콩달콩 사는 것 같다.
K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었다. 20대 시절을 함께한 친구가 그렇게 먼저 갔다.
나는 여전히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고, 다투고, 화해하고 그러고 산다. 
 
오늘따라 유달리 K가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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